화순군문화관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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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은 자주 끊어졌지만 영화관람은 신나는 경험이었다
- 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 <12> 영화의 주인공, 관객
- 극장은 보통 도심이나 번화가에 문을 열었고
- 주변에는 여러 편의 시설과 유흥거리 있어
- 양동시장 인근에 1961년 문 연 광주 현대극장
- 주변에 교통·인구 많은 버스여객 회사 밀집
- 단관 극장은 관객의 욕망 투사하고 반영한 곳
이제까지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한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항상 드는 질문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이유이다. 현재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로 극장을 벗어난 곳에서 언제든지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95년 영화가 세상에 등장한 이래 125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은 영화만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았다. 극장은 보통 도심이나 번화가에서 문을 열었고 극장 주변에는 으레 여러 편의 시설과 유흥거리가 있었다. 극장을 찾는 이유는 극장의 등급(개봉관과 재개봉관 또는 그 이하)을 비롯해 도시와 비도시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한 사례는 사라진 단관 극장 가운데 광주천과 양동시장에 가까운 현대극장을 통해서 볼 수 있다. 1961년 10월 12일 동구 수기동 23번지에서 문을 연 현대극장은 건물 바로 앞에 광주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광주천이 흐르고 있다.
한국영화를 주로 상영한 현대극장은 개관 특선 작품으로 최무룡과 김승호 그리고 조미령이 주연으로 참여한 ‘불효자’(이만희, 1961)를 스크린에 올렸다. 극장 건물은 1억 원 정도의 돈을 들여서 지어졌는데, 무대 공연을 위한 조명실을 비롯해 매점과 다방까지 갖춘 지하 1층과 지상 3층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대식’에 방점을 둔 이유는 극장 내부에 설치된 수세식 화장실 때문이었다. 당시 수세식은 서구적이며 도시적인 구경거리로 여겨져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현대극장이 외화보다는 한국영화를 상영한 것은 양동시장을 드나드는 관객을 고려한 결과였다. 광주지역 최대규모의 양동시장은 극장 앞 광주대교를 건너면 바로 연결되었다. 현대극장은 시장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을 포함해 전국을 연결하는 버스 터미널과도 가까웠다. 현재 동부소방서(당시 ‘광주역사’가 있었다)에서 현대극장까지 대략 250m에 이르는 거리에 각종 여객 회사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인구 수치가 가장 높은 곳이 현대극장 앞이었다.
1976년 ‘광주시외버스터미널’이 동구 대인동에서 문을 열고 여객 회사들이 그곳으로 집결하기 이전까지 현대극장 주변에 장흥여객, 함평여객, 금성여객, 중앙여객 그리고 천일버스 등 버스 회사들이 있었다. 게다가 인근 금남로의 전남여객과 광주여객 그리고 동방여객 등이 더하면서 현대극장 일대는 이용객으로 항상 붐볐다. 교통의 최적지에 자리한 현대극장은 사람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말이면 현대극장 건물 지하 1층 다방에서 맞선을 보는 청춘남녀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상대가 마음에 드는 경우 다방에서의 만남은 영화 관람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도시의 단관 극장은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관객의 다양한 욕망과 필요를 투사하고 반영하는 곳이었다.
비도시 지역의 상설극장 역시 도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군(郡) 단위 지역 ‘읍내’에도 청춘남녀를 위한 만남의 장소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읍내를 벗어난 마을의 사정은 달랐다. 1960년대 중반까지 비도시 지역 유휴 노동력의 상주 비율은 높았으며, 그곳의 지역민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는 노동 특성상 ‘읍내’에 쉽게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곳으로 순업 일행이 방문하여 가설극장을 차렸다. 흥미롭게도, 지역민들은 순업 흥행사를 ‘중매쟁이’ 또는 ‘굿쟁이’로 불렀다. 전자는 청춘남녀가 가설극장에 왔다가 ‘눈이 맞아서’ 결혼에 이르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경우였다.
이에 비하여, 근대 이전 유랑예인을 대표하는 굿쟁이를 순업 흥행사와 동일시 한 이유는 달랐다. 그것은 순업 흥행사의 활동 영역 및 시기 그리고 순회 지역과 사회적 역할이 유랑예인과 닮았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즉, 유랑예인과 순업 흥행사 모두 주로 장터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순업은 창고와 같은 임시 건물 또는 버스 정류장이나 노천(露天) 등지에 천막을 펼쳤다. 마을 규모에 따라서 부락민 가운데 가장 넓은 마당을 소유한 집에서 가설극장을 세우는 일도 있었다. 마을 세도가(勢道家)의 마당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순업 역시 남사당패를 연상시켰다. 또한, 계절과 절기의 변화를 좇아서 움직인 순업도 유랑예인과 닮아있었다. 근대 이전 유랑 예인이 가을 추수 이후 또는 풍어(豊漁)로 물자 이동이 잦은 시기에 움직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업은 봄철과 농번기를 포함한 정월 대보름과 추석 이후 시기를 흥행의 적기(適期)로 여겼다. 이유가 어떻든 ‘굿쟁이’라는 명명은 순업 일행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비도시 지역민 가운데 영화 상영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순업 일행을 좇아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일거리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일은 19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 개시 이전까지 비도시 유휴 인력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지역 공동체의 안정을 고려했을 때 그리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가설극장이 열리면 지역민은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의 밤길을 마다하고 찾았다. 특히, 1950년대 대중매체 미발달은 비도시 지역민이 순업을 환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순업은 라디오 보급률이 낮은 ‘빈한한’ 마을에서 더욱 환영을 받았다. 오락을 제공하는 상업 영화뿐만 아니라 국내외 소식을 전하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도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도, 영화뿐만 아니라 순업 종사자 스스로 새로운 정보의 전달 매체가 되어 전국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뉴스를 전달했지만 동시에 각 지역을 돌며 얻은 ‘사적인 경험과 정보’를 전하는 매개자였다. 그것은 행정기관 또는 특정인에 의해 형성되는 여론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비도시 지역에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대안적인 정보 창구로 기능하였다.
한편 천막으로 만들어진 가설극장은 상영 환경의 특성상 언제든지 관객을 동요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가설극장은 영사 발전기 소음을 포함하여 외부의 소리를 완벽히 차단할 수 없었고 상영 당일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 상영을 중단할 수도 있었다. 영사기사가 변사를 겸하는 경우, 1인 2역의 역할 수행에 따른 정신 분산으로 필름의 릴(reel) 순서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영화는 관람의 대상이라기보다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상영 환경은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비도시 지역민은 사색하는 관객(spectator)이라기보다 집단적 실체로서 청중(audience)에 가까웠다. 집단으로서 관객은 영화 상영과 관람의 규율을 주도하는 처지에 설 수도 있었다. 관객의 입장 상황에 따라서 상영 시간과 종료를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관객이자 지역민의 입소문은 흥행 성적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비도시 지역 영화 관람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 것은 순업과 함께 회자한 청춘 남녀의 ‘보리밭 연애 사건’이었다. 보리밭 연애 사건이라는 용어는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초여름, 영화를 관람한 청춘 남녀의 은밀한 만남이 보리밭에서 이뤄진 것에서 유래했다. 보리밭은 마땅히 만날 곳이 없던 비도시 지역 청춘들에게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보리는 품종에 따라서 1m까지 자라기 때문에 성인이 밭에 누우면 외부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통일벼 보급으로 곡식 수확량이 증가하기 이전까지 농촌 사회는 매년 ‘보릿고개’로 불리는 춘궁기를 겪었다. 1950년대 경제적 빈곤과 일상의 폐허는 보리가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 누군가에 의해 망쳐진 보리밭을 영화를 상영하며 돌아다니는 순업 흥행사의 탓으로 돌리기에 충분하였다. 도시에서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개봉으로 성(性)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세간에 떠도는 동안 비도시 지역 마을은 ‘보리밭 연애 사건’으로 술렁거렸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언제든지 신나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청춘의 한 자락을 기록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 김용택의 말을 빌려 그동안 연재를 마감하고자 한다. 영화(映畵)와 함께 영화(榮華)로운 삶을 꿈꿨던 모든 이에게 바친다.
영화가 곧 시작된다는 소리를 열 번도 더 듣고 나서도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극장 안에 들어가면 대한뉴스마저 몇 번씩 필름이 끊어진 다음 본영화가 시작되었다. 필름은 자주 끊어지고,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화면에는 배우의 얼굴보다 까만 점이나 까만 줄기가 더 많았다. 그나마 까딱하면 필름은 왜 그리도 자주 끊어지는지. 그러면 휘파람 소리가 진동을 하고, 심하면 ‘논두렁 깡패’들이 들고 일어나 포장을 찢고 환불 소동이 나고, 극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곤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필름이 끊어지고, 포장을 세운 서까래가 넘어지고 큰애기들의 광목 찢어지는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어도, 영화를 상영하지 못해도 좋았다. 달이 떠 있고 강물은 달빛 아래로 흐르고, 언덕이 없어 못 비비는 더운 피가 끊는 새파란 젊음이 있었으니, 우리가 바로 영화 속의 살아 있는 주인공이었다.(김용택, ‘촌놈, 김용택 극장에 가다’, 이룸, 2000, 71쪽) <끝>
<광주일보> 기사 전문 (하단 링크)
필름은 자주 끊어졌지만 영화관람은 신나는 경험이었다 < 기사본문 - 광주일보